그리고 이미지 선택에서는 이청조가 더 많은 이미지를 활용하고 그중에 제일 많이 사용한 이미지는 꽃이었다。 소년기에 찬란하게 피어 있는 꽃과 결혼 후에 행복한 꽃,그리고 남편이 돌아간 후 땅에 떨어진 꽃은 그녀의 생활경력에 따라 달랐다。 그녀의 일생은 꽃의 일생으로 비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청조의 많은 이 미지와 달리 황진이는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은 편이다。 그녀는 전통문학에 남성을 청산으로 비유하고 여성을 유수로 비유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자기를 청산 으로 비유했다。 이 점에서도 그녀가 남자에 지지 않으려는 활달한 기품을 볼 수 있다。
기성의 중,한 문학비교 연구성과를 보면 대부분이 황진이와 중국의 기녀시인의 문학 비교에만 초점을 맞추어 황진이와 이청조의 비교연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황진이의 작품을 연구한 전문적인 논문이 있는 동시에 중국에도 이청조의 작품을 전문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본문에서 는 수평연구방법을 도입하여 황진이와 이청조의 애정시를 대상으로 형식적인 측 면에서 그녀들의 표현방식, 이미지 선택을 분석해 그녀들의 애정관을 검토해 보 고자 한다。 작품을 비교하면서 같은 봉건시대에 산 신분차이가 큰 두 시인의 공 통점을 발견하여 각자가 사랑과 이성에 대해 어떠한 의식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 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해 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황진이의 기존 작품은 총 14편 이 있고 그중의 시조6편은 다 사랑의 주제로 된 작품이고 나머지 한시(漢詩) 8편 중에서도 사랑과 관련된 시는 무려 5편이나 된다。 이청조의 작품은 시인의 경력 을 따라 의식도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대략 소년기와 결혼생활기 그리고 방랑 기로 나눌 수 있다。 각 시기 작품에 드러나는 같지 않은 사랑에 대한 느낌과 생 각들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려고 한다。
Ⅱ。본론
1。 황진이와 李淸照의 삶과 작품 소개
1。1 황진이의 삶과 작품 소개
황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 娘),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출중한 재기를 가졌으며 박연폭포·서경덕과 함 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그 당시의 ‘父 나 母 한 쪽이 賤人이면 奴婢의 신분을 면할 수 없다’1고 한 법조에 따르면 황진 이는 태어날 때부터 천인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상의 운명을 버리고 자유를 택하는 것은 바로 황진이의 남 다른 매력이었다。 일반 여인처럼 적당한 나이에 부모의 명을 받고 시집을 가서 한편생 남편을 모시는 평온한 길을 포기하고 기생으로 자기의 재능과 생각을 대 중에게 보여주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조선사회는 남성들의 여성편력에 대해 관대했다。 하지만 규방의 여성들은 남성 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었다。 관대함과 제한성이라는 상충된 환경에서 이 둘을 연결시킨 것이 ‘기녀’였다。 기녀는 조선사회에서 남성과 공식적으로 관계할 수 있 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갖출 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이라는 재능까지 갖춘 황진이는 남성들에게 많은 호감을 얻었다。 그녀의 삶 에 많은 영향을 끼친 남자들의 일화도 많이 전해왔다。 예를 들어, 화담 서경덕과 의 일화2 ,벽계수와의 일화3, 이사종의 일화4, 소세양과의 일화5,지족선사광의 일화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