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 동안 지속 되어 온 시간의 파도 속에 중한 양국의 사이는 변하지 않고 긴밀하게 유지되어왔다。 예전부터 중국은 한반도에 강한 영향력을 미쳐 왔다。 19 세기말 20 세기초는 한국이 봉건사회를 현대문명사회로 전변하는 전환기였다。 한국은 간신히 중국의 악제에서 벗어나지만, 서양 나라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중국도 서방 나라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 되었다。 중한 양국은 비슷한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1919 년 3·1 운동이 고조를 이르킬 때 3 월 21 일에 해삼창에서, 4 월 11 일 상해에서, 4 월 21 일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 기간에 중국으로 들어온 사람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운동가, 자유로운 사상을 공부하러 온 문인과 유학생;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살길을 모색하러 온 이민자들이었다。
1842 년 8 월에 맺은 『남경조약』때문에 상해는 유럽, 미국과 무역 통상하는 항구가 되고 급속히 상공업 도시로 발전되었다。 11 그리고 중국 제일이고 아시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20 세기초에 와서 상해는 계속 발전하고 중국 경제, 무역, 금융과 문화 센터가 되고 명성이 두루 알려져 있는 “자유의 땅”, “모험가낙원”이 되었다。 1919 년 4 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서기 전후에 더 많은 한국 정치가, 문화인과 유학생들이 상해로 왔다。 상해 지역으로 온 대표적인 한국문인은 이광수, 주요섭, 김광주, 심훈, 신채호, 피천득, 최상득 등이 있다。 문인들은 상해에 관한 시, 소설, 산문, 수필 등 문학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항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는 고도이지만, 상해에 비해 근대화 문명의 충격을 상대적으로 받지 않았다。 항주에 와 본 적이 있는 한국문인은 주로 심훈, 주요한, 김광주 등이 있다。 북경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내륙에 차지하고 있고 오래된 역사문화도 잘 지켜서文献综述
11 『남경 조약』, 『장닝 조약』이라고도 한다。 중국 근대사 외국과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다。
상해보다 현대문명의 충격을 덜 받았다。 그 때 주요섭, 심훈, 김사양, 이육사, 신채호, 한설야 등 한국문인들이 북경에 와서 독특한 각도로 당시 북경의 모습을 기록했다。 만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연접하여 이동이 쉬울 뿐만 아니라 일찍 항일활동의 주요 활동지가 되기 때문에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훤씬 많은 한인들이 망명과 이주한 공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효석, 유진호 등이 있다。 이 밖에 남경과 소주와 같은 역사문화가 유구한 도시도 주요한 등 작가의 작품에 등장했다。